여행스케치

가을여행"별바람언덕에 서서, 가을바람을 만나다"

뚜벅 뚜벅 2025. 10. 25. 18:24





경남 거창군 감악산 별바람언덕에 서서, 가을바람을 만나다


가을이 오면 문득 산이 보고 싶어진다. 여름의 녹음이 물러나고,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질 무렵이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바람의 냄새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피어난다. 그래서 나는 거창으로 향했다. 감악산, 그리고 그 품 안의 별바람언덕.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별과 바람, 언덕이라니. 마치 세 단어가 어우러져 시 한 편이 되는 듯했다.







거창군 가북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조용했다. 논은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바람결에 벼이삭이 몸을 맡긴다. 마을 어귀를 지날 때마다 국화 향이 흘러나왔다. 차창을 열자 찬바람 사이로 들꽃 냄새가 묻어왔다. 그 향기 속에는 ‘가을’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멀리서 감악산이 보였다. 굽이진 능선이 부드럽게 하늘에 닿고, 그 위로 하얀 구름이 천천히 흘렀다. 감악산은 높이 945미터. 그리 높지 않지만, 그 안에는 묘한 기운이 있다. 험하지 않고, 위압적이지도 않다. 그저 넉넉하고 포근하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삶을 품어온 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쉬어가는 그런 산이다.





별바람언덕으로 향하는 길은 평화롭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천천히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허리쯤에 이른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가 트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멎는다. 언덕 위에 서면 발아래로 거창의 들판이 펼쳐지고, 그 위를 가을 햇살이 천천히 쓸고 지나간다. 바람이 불어오면 억새가 물결처럼 흔들리고, 풍차가 돌아간다. 이름 그대로, 별과 바람이 함께 머무는 언덕이다.




풍차 앞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볼끝이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차가움보다 따뜻했다. 어쩐지 오래된 기억을 불러오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 마당에서 느꼈던 흙냄새와 풀향기, 저녁의 연기 냄새 같은 것들. 그때의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바람을 맞았는데, 지금의 나는 그 바람 속에서 잠시나마 그때의 나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억새의 은빛 이파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손끝으로 살짝 스치자 부드러운 결이 느껴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억새는 서로 몸을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 같았다. 누군가는 이곳을 ‘바람의 언덕’이라 불렀다지만, 나에겐 ‘기억의 언덕’이었다. 내 안의 잊힌 순간들이 바람을 따라 하나씩 되살아났다.






언덕 아래로 눈을 돌리면, 작은 마을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연기마저 바람에 실려 흐른다.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이곳에서는 시간조차 잠시 걸음을 멈춘다. 도시의 소음과 다툼, 빠른 걸음이 모두 멀리 느껴진다. 오직 바람만이 귓가를 스쳐가며 속삭인다.
괜찮다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그 말에 마음이 풀린다. 여행이란 결국 멈춤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다다름이 아니라 머무름, 채움이 아니라 비움. 별바람언덕의 바람은 그런 의미를 가르쳐주는 듯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의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이곳의 바람은 방향이 없다. 그저 어디서든 와서, 어디로든 간다.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온기가 있다. 억새 사이를 스치며, 나무의 잎을 흔들고, 사람의 마음을 적신다. 자연이 건네는 인사 같았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언덕 위의 억새는 은빛에서 금빛으로 변했다. 바람은 조금 더 느려졌고, 공기는 따뜻했다. 하늘은 붉게 물들며 하루의 끝을 알렸다. 풍차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언덕 끝에 섰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서 가을이 웃고 있었다.

별바람언덕의 이름은 참 잘 어울린다. 낮에는 바람이, 밤에는 별이 머문다. 밤이 되면 수많은 별빛이 쏟아지고, 바람은 그 빛을 흔들며 언덕 위를 지난다고 한다. 나는 그 밤의 언덕을 상상했다. 별빛 아래에서 억새가 춤추고, 바람이 노래하는 모습. 언젠가 다시 와서 그 풍경을 꼭 보고 싶었다.





언덕을 내려오는 길, 내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바람이 내 안의 불필요한 생각들을 하나씩 털어내 준 것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대로인데, 그걸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져 있었다.

감악산의 바람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공기가 아니다. 그것은 계절의 숨결이자, 마음의 방향이다. 별바람언덕에 서면 누구나 자기만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어떤 이는 지난 사랑을, 어떤 이는 잃어버린 꿈을, 또 어떤 이는 단지 지금의 평화를. 그리고 바람은 그 모든 이야기를 조용히 받아들인다.

나는 그 바람 속에서 다시금 삶의 속도를 느꼈다. 너무 빨리 달려온 날들, 미처 느끼지 못한 계절들. 하지만 바람은 말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언덕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풍차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바람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바람이 불어오는 한, 감악산의 가을은 계속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문득 그 언덕을 떠올린다. 별빛이 내리고, 억새가 흔들리던 그곳. 그 언덕 위에서 나는 분명히 느꼈다.

지금, 나는 가을 속에 바람을 맞고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