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나, 풍경 둘

어버지의 꽃밭

뚜벅 뚜벅 2026. 4. 4. 23:37

아버지의 짧은 자리 비움이었다. 친구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오겠다며, 기다리라 이르고 일어선 그 걸음 채 10분도 되지 않았을 그 찰나에, 내 생애 가장 긴 공포가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낯선 남자가 길을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아버지가 계신 담벼락 바로 그 너머에서, 내 목덜미를 잡았다. 사선으로 질질 끌려가 텃밭 나무 아래 처박혔고, 숨이 끊길 것 같은 손이 내 목을 조여들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아버지였다.

너머 저 집에 계신다는 사실이, 목숨처럼 기억났다. 평생 지를 수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아버지를 불렀다. 목이 쉬어가면서도, 그 한 줄기 외침만이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왔다. 굉음과 함께 그놈을 제압하고, 한 손으로는 그 목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셨다.

"괜찮냐. 다친 데 없냐."


가시에 찔려 귀 밑으로 피가 흘렀지만,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벗겨진 신발 두 짝을 그 자리에 두고, 맨발로 뛰기 시작했다. 그날의 질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너무나 무서운 고통의 달리기였다.


그 이후로 아버지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경찰서를 다녀온 뒤, 아버지는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어 하셨지만 번번이 힘없이 뒤돌아 걸어가시곤 했다. 멋쟁이였던 아버지가 백지장 같은 얼굴로 오랫동안 마당을 서성이셨다.
나는 식은땀으로 외출을 못 하고, 아버지 곁만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였다. 아버지가 조용히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셨다.
긴 골목에 코스모스 씨를 뿌려 코스모스 길을 내셨다. 가을이면 하늘거리는 분홍빛, 흰빛, 붉은빛이 그 골목을 가득 채웠다. 새끼줄에는 나팔꽃을 주렁주렁 달아놓으셨고, 마당 모서리부터 장독대 앞까지 상사화를 심으셔서 잎 지고 꽃대만 키다리처럼 올라와 분홍빛으로 웃게 하셨다.
채송화, 봉숭아, 보랏빛 단국화, 샐비어, 분꽃, 도라지꽃, 백합, 백일홍, 무화과나무, 구기자 새빨간 열매까지 빈틈없이, 해마다, 아버지는 마당을 꽃으로 채우셨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셨다.


다만 꽃 앞에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팔꽃이 폈네. 웃는다, 봐라. 꽃대만 올라와서 이렇게 꽃이 피네 사람도 똑같아. 그냥 피고 지고 하는 거야."

나는 마루 너머로 아버지의 동선을 눈으로 좇으며 그 말들을 자장가처럼 들었다. 그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을 보며, 나도 조금씩,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꽃밭은 말 대신 건네는 위로였다.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을, 아버지는 씨앗으로 땅에 묻었다. 그리고 해마다 그것들이 피어올라 내 딱지 위에 연고처럼 내려앉았다.

땅을 비집고 나오는 꽃들이 가르쳐주었다.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를. 시들어도 다시 피는 것이 생명임을.
오랫동안 그 꽃들은 나와 함께 피고 졌다. 아버지도, 나도,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꽃밭 안에서 서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집에 갇혀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를 책만 보고 숙제하는 일상이 안타까웠는지 오래옆에 앉아 있기도 하셨다.  아버지의 동선을 바라는일은 시간을 때우기에 참 좋았다.  
그 꽃들은 꽃밭에서 나의 그 시간을 채워주었고 공부만 하는 나를 그들
 가까이로 한발국 한발국 옮기고 있었다,



https://youtu.be/jx5bCrc_JZw?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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