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하나, 풍경 둘

셔틀곡의 추억 내친구 프레드/강해원수필

뚜벅 뚜벅 2026. 5. 27. 20:36




마흔 언저리,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낯선 땅 싱가포르에 첫발을 디뎠을 때를 떠올립니다. 창이공항 근처의 한적한 주택가는 눈이 시리도록 깨끗했고, 선진국의 세련된 문화가 조용하게 흐르는 멋진 곳이었습니다. 그 낯선 길, 낯선 풍경 속에서 아이들의 일상과 맞물려 나의 하루하루도 그렇게 조용히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이웃들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이가 있습니다. 언제나 수영을 하거나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다니던, 운동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남자였습니다. 늘 여름날처럼 스포츠 짧은 바지를 입고 활기차게 걸어 다니던 프레드. 나 역시 운동이라면 빼놓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서툰 영어로도 스포츠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콘도 커뮤니티에서 그와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는 유독 나와 배드민턴 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난 프레드의 쉬는 날 낮 시간이나, 그가 퇴근한 저녁이면 어김없이 우리 집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콘도 내 실내 배드민턴장으로 나를 불러내곤 했지요. 스포츠로 다져진 그의 검게 그을린 몸은 늘 건강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몇 번 셔틀콕을 주고받던 프레드는 내게서 남다른 운동 감각을 발견했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나를 '한국 대표'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은 '싱가포르 대표'라 칭하며 은근슬쩍 국가전 분위기를 유도하곤 했지요. 워낙에 애국심이 남다른 터라 그 말만 들으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습니다. 요즘 활약하는 안세영 선수보다 더 높은 기상으로 머리를 질끈 꽁지 묶고, 라켓을 꼭 쥔 채 셔틀콕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매트 위를 사정없이 뛰어다녔습니다.

주위 이웃들은 재미 삼아 점수를 매기며 흥을 돋웠고, 나는 정말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라도 된 양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코트를 누볐습니다. 아니, 그때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진짜 국가대표였습니다. 반도의 우리나라가 도시국가싱가포르에겐 절대 질수없는 절대절명의 긴장감! 거의 매번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지만, 신기하게도 승리는 자주 나의 몫이었습니다. 이길 때면 나는 "코리아!"를 외치며, 네트를 돌아 대한민국을 포효하는 기상으로 두 팔을 벌린 채 토끼처럼 코트를 뛰어다녔습니다.

한번은 이기고 나서 흥에 겨워 아리랑을 멋지게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내가 부르는 노랫가락이 신기했는지, 프레드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더니 "그 노래가 혹시 한국의 국가(National Anthem)냐"고 물었습니다.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슬프면서도 깊은 정서가 느껴진다며 제게 가르쳐달라고 청해왔습니다. 그렇게 배드민턴 코트 위에서 그에게 아리랑을 한 소절씩 가르쳐주며 함께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내가 어찌 그를 진짜 실력으로 이겼을까, 그저 기분 좋으라고 져준 게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내가 이겨서 코트를 뛰며 좋아할 때면 늘 멋지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던 사람. 어쩌면 아이처럼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아서 은근슬쩍 져준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곱게 물드는 저녁노을처럼 늙어가고 있을 프레드는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요.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여전히 건강미 넘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문득문득 궁금해집니다.

몇 해 뒤, 여행 삼아 훌쩍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도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따뜻한 저녁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프레드는 그때도 여전히 유쾌하고 반가운 모습 그대로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지요. 식사자리에서 셀카로 나를 담는듯했지만 나는 찍어보고 싶어도 못찍는 바보같아서 에이 그때 확 한장 찍어올걸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시는 못만날수도 있는데 그런용기는없는듯합니다.
"우리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더라도, 각 나라 대표처럼 건강하게 잘 살자. 그리고 배드민턴을 칠 때면 꼭 내 생각을 해줘."
그때 그가 건넜던 다정한 말들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든든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실, 그 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배드민턴 라켓을 잡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몇 번 동네 모임에 라켓을 들고 가보기도 했지만, 그곳에는 프레드처럼 유쾌하고 수평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프레드처럼 나를 위해 기꺼이 멋진 라켓을 들어주던 다정한 배려도 없었지요. 그 마음의 거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어느 동네 코트장 언덕에 배드민턴 라켓을 그냥 버리고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내게 배드민턴은 오직 프레드와의 시간 속에서만 빛나는 것이었나 봅니다.

싱가포르 남자들은 참 친절했습니다. 가정을 방문해 보면 집안일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도왔고, 아파트마다 활성화된 커뮤니티에 모이자고 하면 저마다 집에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와 나누어 먹곤 했습니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녹아 있는 수평적인 문화와 몸에 밴 깔끔한 매너는, 한국의 일상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참 아름답고 멋진 문화적충격을 심어준 추억이었습니다.
어느덧 인생의 계절이 저물어가는 길목에 서고 보니,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수많은 추억이 깃든 그 싱가포르를 꼭 한번 다시 방문하고 싶어집니다. 잘 늙어가고 있을 프레드도 보고 싶고, 다정했던 캐서린 가족의 얼굴도 다시금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동안은 그저 받기만 했던 그 시절의 과분한 감사함을, 이번에 가게 된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먼저 넉넉하게 베풀어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면 늘 최고의 것으로 극진하게 대접해 주던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리니, 나의 마음은 벌써 싱가포르의 배드민턴 코트 위에서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편에서 다정하게 날아올 프레드의 셔틀콕을 기다립니다.
할수있다면 국가대항전을 느리게라도 한번해보고 싶습니댜

나의 인생 한 페이지에 '국가대표'라는 눈부신 타이틀을 달아주고, 내 안의 활기찬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선사해 준 프레드. 그는 참으로 즐겁고, 예의 바르며, 내 생에 다시 없을 멋진 친구였습니다.

https://youtu.be/fVwVookIAf0?si=MLLVWvWR2xcVWK1b

조용필 - 추억 속의 재회 [광복80주년 KBS대기획 -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 KBS 251006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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