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태어나 넝쿨넝쿨 기어올라 담벼락에 매달렸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나는 노랗게, 환하게, 온몸으로 피어났다.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바람이 흔들면 흔들리는 대로, 비가 오면 젖는 대로, 그냥 거기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들, 잠깐 발걸음을 멈추더니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배 속 계산부터 한다. 호박이 달리겠네. 호박죽 끓여야지. 호박전도 부쳐야지. 주절주절 주절주절, 한참을 떠들다가 간다.
나도 안다. 내가 크면 호박 될 거. 그 무겁게 지탱해야 될 운명, 나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이 순간, 노랗게 피어 있는 나는 아직 호박이 아니잖아. 호박 되기 전에, 나는 분명히 꽃이었잖아.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거다. 꽃이 져야 열매가 오는 거다. 그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 왜 꽃인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니. 예쁘다, 그 한 마디면 됐는데. 고맙다, 그 한 마디면 충분했는데.
담벼락 붙잡고 하루 종일 대롱대롱. 오늘도 나는 그 한 마디 기다리다 해가 저물었다. 누군가 그냥 한 번만 올려다봐 주기를, 지나치지 말고 딱 한 번만 멈춰 주기를 바라면서.
나 호박꽃이야. 호박 되기 전에, 나도 꽃이야. 못생겼다고, 흔하다고, 어차피 호박 될 거라고 그냥 지나치지 마. 노랗게 피어서 여기 있잖아. 담벼락에 매달려서, 오늘도 여기 이렇게 피어 있잖아.
전설처럼 내려오는 호박꽃의 비애를 담벼락에 화석처럼 매달았으니 이제부터라도 노랗게 벌을 품고 호박을 만들어 내는 내가 정말 예쁜 꽃으로 대접받고 싶어
나도 예뻐해 줘. 호박꽃 비애를 벗고 이제는 나를 금꽃으로 불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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