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책도 신문도, 일제히 입을 다물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도시 전역을 짓누르는 정체 모를 무거운 공기 속에서 하늘과 땅은 잔뜩 몸을 낮추어 붙어버렸고, 그 좁은 틈 사이로 비굴한 바람만이 간신히 기어 다니고 있었다.
국민윤리 시간, 선생님은 수업 대신 홀로 선구자를 불렀다. 태어나서 줄곧 유일무이한 대통령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죽음 앞에 우리는 하늘이 무너진 듯 흐느꼈지만, 선생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며 더 크게, 더 절규하듯 노래를 토해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노래는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감히 말로는 꺼낼 수 없었던 무언가였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나는 한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얀 교복을 벗고 설렘 가득한 스물살 문턱을 막 넘었을 무렵이었다. 혼자 길을 걷다 우연히 들른 YMCA의 풍경은 잔혹했다. 벽에 걸린 사진 몇 장은 어린 눈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처참하여, 채 다 보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와 뒷걸음질을 쳤다. 머릿속이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지금까지 배워온 이데올로기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굉음이 들려왔다. 눈물이 자꾸만 떨어지고, TV 속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 앞에서 나의 모든 세계는 부르르 떨리며 절규했다. 국가가 이렇게 거짓말로 진실을 덮는구나.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 내 스물살언저리는 거리 위에 내던져졌다. 겁먹은 토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넘어지기도 하면서, 나는 구호를 외치는 그 찬란한 무리 속으로 겁도 없이 걸어 들어갔다. 거리에서 삼삼오오 대열에서 주저주저하면 가끔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도 명예도 없이 무반주 임을위한행진곡 을부르며 떨리는 한 발을 내리고 가장먼저 용기있게 상기된얼굴로 사람들의 두려움에
강한 촛불을 켰다.
내 친구는 내손을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난
너만 믿어! 하는 눈빛으로 따라 걷고 있었다.
나도 완전히 겁 많고 두려움이 많은데 그해 초여름은 얼굴이 다 타버릴 정도로 우리의
싸움은 길 위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달리기를 못 하는 친구와 달리기에 자신 있던 나는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지하 소식통처럼 점조직으로 전해지는 집회장소에 어디든 뛰어다녔다. 버스가 멈춰 서고 사람이 구름처럼 길을 가득 채우던 어느 날, 독재타도 호헌철폐 그 구호가 먹히는 듯했다. 드디어 세상이 바뀌는구나 싶어 한숨 돌릴 때, 무거운 독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돌아온 것은 최루탄의 굉음과 앞을 뿌옇게 가리는 연기뿐이었다.
누군가 따라오기 시작하고 추격전이 시작될 때쯤 내 친구부터 휘청이더니 나도
방향을 잃고 있었고 헤매는 친구를 내 몸에 붙여 질질 끌다시피 사력을 다해 뛰던 그
어느 날 오후, 심한 반격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덥고 습한 무겁고 힘든 공기가 우리를 나 잡아봐라 게임 속으로 순식간에 끌고 들어갔다.
우리들 등 뒤로는 군화 발소리가 쿵쾅쿵쾅 따라오기 시작했고. 청백 계주 때보다 더 힘껏, 두 발은 "나 잡아봐라"를 외치며 사력을 다해 달렸다. 내 친구를 놓고 뛰면 빠를 텐데 놓을 수가 없었다. 거의 한 몸이 되어 지쳐서 속도가 늦어지고 있을 때 교동 어느 골목 안으로 턴을 할 때쯤 이름 모를 가게 주인의 손길이 갈고리처럼 우리를 끌어당겨 우리는 순식간에 안으로 훅 끌려 들어갔다. 철거턱 내리는 새시문의 작은 구멍 하나에 눈을 박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숨소리조차 낼 수 없어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켰다.
긴박한 공기가 철문을 사이에 두고 가득 차오르는 동안, 비 오듯 흐르는 땀이 우리들의 20대의 붉은 티셔츠를 흠뻑 적셨다. 아직도 그 가게 주인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기억이 없고 인사를 한 기억도 언제 그 장소를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그냥 백지상태로 그날의 습한 공기와 깜깜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우리 둘의 구세주였던 손의 괴력과 숨소리, 땀, 어둠 속에 인생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게임을 통과하고 있었다. 감옥 갈뻔한
그 어둠 속을 부지런히 통과하고 있었다. 감옥에 갔으면 나도 항소이유서를 멋지게 적고 포효하는 눈빛으로 역사에 점을 찍을 기회는 그렇게 소멸되고 있었다.
그냥 확 끌어당긴 힘! 새시문이 1초 만에 내려간 아득한 기억밖에 없다. 그 찰나에
우리는 그냥 미친 듯이 하나가 되었고 한 몸이 되어버린 현장에 우리의 젊음이
비굴하지 않고 무언가 해내고 있다는 용기 섞인 숨소리만 그 선생님의 선구자노래 속에 리듬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쿵쾅거리며 달렸던 그 미완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무거운 권력의 파고를 헤치며 아직도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날의 "나 잡아봐라" 혹독한게임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속에 눈부시게 내삶에 이긴 게임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그날 우리를 쫓다 놓쳐버린 전경들은 지금 어디에서 지내고 있을까.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어쩌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스물언저리였을것이다. 그들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잘 뛰던 우리를 잡지 못한 미로의 숨바꼭질 골목을 기억이나 할까
아마 그들도 어쩌면 알고도 눈감고 그 가게 앞을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 마음도 민주주의의 아픈 기억으로 그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한 끗 차이로 그냥 따라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은 천천히
쫓는 자와 쫓기는 자로 나뉘었던 그 거리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시대의 자식들이었다. 역사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지만, 그날 그 골목에서 함께 숨을 헐떡이던 우리는 쫓기던 자도, 쫓던 자도 어쩌면 똑같이 그 시절의 피해자였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죽을힘을 다해 달렸던 두 발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말해준다.
그날의 나 잡아봐라 게임은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그 친구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가끔 그날을 기억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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