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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지의 꽃밭

아버지의 짧은 자리 비움이었다. 친구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오겠다며, 기다리라 이르고 일어선 그 걸음 채 10분도 되지 않았을 그 찰나에, 내 생애 가장 긴 공포가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어슬렁어슬렁 나타난 낯선 남자가 길을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아버지가 계신 담벼락 바로 그 너머에서, 내 목덜미를 잡았다. 사선으로 질질 끌려가 텃밭 나무 아래 처박혔고, 숨이 끊길 것 같은 손이 내 목을 조여들었다.그 순간 떠오른 것은 아버지였다.담 너머 저 집에 계신다는 사실이, 목숨처럼 기억났다. 평생 지를 수 있는 힘을 모조리 끌어모아 아버지를 불렀다. 목이 쉬어가면서도, 그 한 줄기 외침만이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왔다. 굉음과 함께 그놈을 제압..

봄의 노래

사각블록에딱띡한 그위에걷다가 멈춰섰다보라 노란빛이앙증스러운 얼굴으로두팔벌리고 제발 밟힐까봐깊은 울음를 토해내고있었다흐트려지게 날리는 벚꽂들의향연 백리길에서그 척박한 바닥에 납작업드려숨죽여 피고 있었네보라 노랑은 가잠 낮은곳부터노래부른다고 내 발 멈추게한 너!너도 아름다운 봄이다https://youtu.be/IR6vVgvxmWQ?si=cnrdYqtmcdhXjfcQhttps://youtu.be/tPJIE0HLghE?si=3HXOHYYhaqDgP0iW

목련등

그 집 앞백열등 하나목련처럼 환하다꽃잎은 분분히 떨어져잊혀가는 문장들 갈색등되어 땅에 누웠으나끝까지 지켜야 살수있다고 그집앞 흰 등불 하나떠난 꽃의 숨결을 대신해밤새 도란도란환한 안부를 묻고 있다다시 봄이다! 외로운 봄이다불 꺼지지 않는 마음 하나환하게 가지 끝에 걸려 아기부처꽃 백련으로 태어나그 집앞 지키고 있네떨어지지 마!

아버지의 등

아버지가 등을 내밀며 타라 하면, 나는 절대 한 번에 올라타지 못했다. 겁이 많아서 까치발로 발을 세우고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제야 아버지의 넉넉한 품에 이끌려 자전거 뒷안장에 앉곤 했다. 꼭 잡아. 그 한마디에 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두 팔로 감아 안았다. 아버지의 등 뒤에서 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따르릉 소리와 함께 골목을 질주하던 아버지. 거기가 어디인지, 어느 골목을 달리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 눈앞에는 오직 아버지의 넓은 등만 있었다.그렇게, 오래도록 그렇게, 아버지의 등과 자전거는 내 유년의 바람이었다. 지금도 가슴 한편에 평온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시절이그런데 어느 날, 라운딩이 멈췄다.그 일이 있고 난 뒤, 아버지는 다시는 나를 자전거 뒷안장에 덥석 앉혀 주지 않으셨다. 초등학교..

새벽손님

문득 눈을 뜨니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너내 곁에 가만히 앉아조곤조곤 말을 건넨다"왜 왔어""글이 너무 급해"쉬어 가야지꼭꼭 찝어 말하는 너"오타가 있어"이건 시 형식에 안 맞아나는 휙 돌아눕는다"글에도 향기가 있어"마음만 읽으면 되는거야긴 세월 한결같이너는 나에게 그 말만 하는구나혼자 중얼거리니새벽은 나에게 더 자라고새벽녘 식은 이불을 덮어준다https://youtube.com/shorts/WzcUdV9zuB0?si=_lr0tAv05uABx9AW[네이버 블로그] 블로그를 소개합니다.- 글빛문학https://m.blog.naver.com/hanwoori380

이 찬란한 봄날에

누군가 놀란 마음을진정하려집 앞에 노랗게 물감을 뿌렸다꽃잎이 노랗게 젖었다그래도 놀란 가슴은쉬이 가라앉지 않는다하늘이 내려다보다아주 연한, 연한 하양으로살며시 달래주었다개나리라고 너를 불러주니노랑꽃이 피고벚꽃이라 불러주니하얀 꽃이 피었다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이 찬란한 봄날마음 한곁이 노랗게 하얗게조금씩 밝아졌다

나 잡아봐라

사람도 책도 신문도, 일제히 입을 다물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도시 전역을 짓누르는 정체 모를 무거운 공기 속에서 하늘과 땅은 잔뜩 몸을 낮추어 붙어버렸고, 그 좁은 틈 사이로 비굴한 바람만이 간신히 기어 다니고 있었다.국민윤리 시간, 선생님은 수업 대신 홀로 선구자를 불렀다. 태어나서 줄곧 유일무이한 대통령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죽음 앞에 우리는 하늘이 무너진 듯 흐느꼈지만, 선생님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창밖만 내다보며 더 크게, 더 절규하듯 노래를 토해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노래는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생님이 감히 말로는 꺼낼 수 없었던 무언가였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나는 한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하얀 교복을 벗고 설렘 가득한 스물살 문턱을 막 넘었..

예쁜엄마 2

어쩌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아장아장 걸어올 때부터 두 팔 벌려 꼭 안았다. 치마폭을 원 없이 내주고 또 내주었다. 엄마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내가, 일밖에 모르는 짝꿍 덕분에 긴 시간을 생으로 홀로 뛰어다니며 키운 아이들이었다. 서툴렀다. 그래도 뛰고 또 뛰었다.큰아이는 글쓰기 상을 휩쓸었다. 한글학회장 상을 받아 달려올 때, 나는 내 일보다 두 배의 감동을 느꼈다. 상패와 상금을 손에 쥔 아이를 보며 숨 막히게 기뻐했다. 그림도 공부도 못하는 게 없어 대견했지만, 그 시간 안에는 성장통도 있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또 지켜봐야 했다.둘째는 끊임없이 자기 길을 두드리며 달렸다. 달려라 하니처럼, 그림에 대한 열정이 유독 깊었다. 공부도 멋지게 해내며 상장과 결과물을 쌓아가더니, 지금도 힘겹게 자..